오늘의 할 일 : 쓰잘데기 없는 일 하나라도 하기.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우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못해도 하루에 5개씩은 TO DO LIST를 채워가며 분단위로 쪼개 살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미래와 달리. 나는 ‘오늘 어떻게 하면 내가 생각하는 쓸모없는 일을 하나라도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확히는 약 1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일명 ‘씊’ 프로젝트는 우연히 본 영상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마음의 치유가 필요했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일과 타인으로부터 정의되는 내가 아닌, 진정한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보다 내가 되고 싶은 존재만 너무도 크게 남아 있어 내가 이 세상에 발을 디딛고 살고 있는 건 맞는지. 아니면 욕심에 잠식 당해 그냥 껍데기인 몸만 이끌고 살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이질적이었다.
그 해답을 찾아가는 와중에 <영감수업>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발견했다. ‘래릿’이라는 유튜버의 말을 듣다 보니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핵심이 들렸다. ‘나를 부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못난 모습도 받아들이는 것.’ ‘내 감정이든 행복이든 판단하지 말고 바라보는 것.’ 그렇게 나는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출근할 때, 밥을 먹다가, 잠을 자기 전. 부정적이고 힘든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그냥 감정을 나열했다. 이런 사건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 감정을 판단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너무 치사한 일에 속상함을 느꼈을 때. 이전 같으면 이런 걸 서운해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어서 빨리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을 테지만. 감정일기의 핵심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그래서 내게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세심히 느끼면서 써 내려갔고, 마지막에는 꼭 되뇌었다.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
핵심은 이것이었다. 인정하면 사라져. 부정하면 알아달라고 끝까지 남아있어. 그러니 인정해.’ 감정 뿐만이 아니라 나는 나의 너무 많은 부분을 부정했다. 조금은 더 남들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이기를.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기대치에 부응하기를.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내가 생각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행동들에 빨간딱지를 붙여댔다. 이 감정 압수. 이 행동 중지. 그러다 보면 내가 상상하는 더 멋진 자아의 나로 변하지 않을까. 내가 하지 말라고 표시해뒀으니 안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를 과도하게 고쳐내려고만 했다. 때로는 채찍질이 나에게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지금의 나로 자라게 만든 것도 있었지만. 결론은 곪고 상처가 나서 터졌다. 그런 하찮은 맷집마저도 싫어 나는 괜찮다고 무시해 온 세월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음을. 아니 그보다 더 평범하고 작은 우주 먼지임을. 내가 기대하던 만큼의 멋진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이 생각보다 자주 오지 않아서 토라지는 유치한 꼬마임을. 말로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하지만, 집에오면 침대에 벌러덩 누워 유튜브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한량임을. 그렇게 생각하니 무엇을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기왕이면 내가 즐거워하는 걸로, 평소에 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이참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본 유튜브 영상의 ‘래릿’님은 조금 다른 관점의 프로젝트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주 사소한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으로 (예를 들어 운동 습관을 만든다면 헬스장에 출석하는 정도의 목표로) ‘세상에서 가장 쓰잘데기 없는 프로젝트’를 해보라고 얘기했고, 나는 거기서 영감을 받아 하루에 하나 아주 쓸모 없는 걸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해보고는 싶었으나 지나친 자기 검열과 생산성을 운운하며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가는 프로젝트,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씊’이다.
이 프로젝트를 불지펴 준 계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 적어도 내 이상향의 모습과 비슷한 조승연 작가님의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이전에는 그의 풍부한 지식을 듣는 것만으로 넋이 나가서 딱히 지각하지 않았는데, 위 일련의 생각과 과정들을 겪고 나니 한 가지 일관된 모습이 보였다. 그가 영상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인정해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게 느껴졌다. “저는 시간적, 물리적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어요.” “일이 더 들어와도 제가 추구하는 자유,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이 줄어든다고 느껴지면 일을 더 벌리지 않아요.” “한 가지를 깊게 아는 장인 정신을 존경하지만, 저는 태생이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새로운 것들을 계속 알아가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그는 (뛰어난 언변과 지적 능력이 있지만)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맞춰가면서 더 ‘그’다워 진 삶을 사는 게 보였다. 그것도 더 멋지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그렇게 나의 첫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요리 라는 해시태그와 대강 찍은 음식 사진과 함께, 레시피를 설명하거나 만든 노고에 감탄하는 글이 아닌, 이런 비효율적인 일을 왜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투정을 올린다. 제법 생산적인 #책 인증을 해 보이지만, 당장 현업에 써먹을 일은 없는 IT 지식과 관련된 책을 아주 조오금 한 두장씩 읽는다. 그날 퇴근하고 본 드라마. 정말 아무것도 못 한 날에는 차라리 늦잠이라도 자면서 인증을 한다. 웃기는 일이다. ‘끝내주게 놀기’라는 체크리스트에 줄을 긋는 짤처럼, 어떻게 하면 하루에 하나라도 더 쓰잘데기 없는 일을 할지 고민하는 게 요즘 내 삶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지고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씊을 못한 날에도 괜찮다. 그야말로 생산성만 가득한 삶을 살았으니까. 그런 날에는 잠이라도 일찍 자서 씊을 채운다. 아님 퇴근길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프렌즈 한 편을 본다. 딱히 누군가에게 자랑할 거리도, 누가 이 과정을 지켜봤으면 하는 마음도 없어서 몰래몰래 혼자 부계정에 업로드를 하고 있다. 언젠가 30개, 100개가 채워지면.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나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면, 다른 이에게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종종 일반 해시태그를 타고 들어와 ‘좋아요’를 남겨주는 이들을 만나면 공짜 선물을 받은 기분도 든다. 얼마나 이 프로젝트를 잘 유지하는지가 중요하니까, 하나씩 기록을 채워가 보고자 한다. 오늘도 한 잔의 씊을!